고대 서양사: 로마와 그리스, 유럽 문명의 시작
고대 서양사: 로마와 그리스, 유럽 문명의 시작
고대는 인류 문화의 시작점으로, 대체로 서로마 제국의 몰락(476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에 로마와 그리스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 유럽 문명의 근간이 되었다.
늑대가 기른 로물루스, 로마를 건국하다
로마의 기원은 트로이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가멤논이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 목마' 전술로 소아시아의 트로이를 함락했을 때,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는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알바롱가를 건립하고, 이것이 로마인의 시조가 된다.
이후 아물리우스에 의해 왕가가 찬탈되지만,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건립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쌍둥이 형제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로물루스는 개국 초부터 정치권력을 원로원(Senatus)과 민회(Comitia)로 분리했다. 이는 로마에 민주적 분위기를 불어넣은 중요한 결정이었다. 사비니 여인의 강탈을 통해 여성 부족 문제를 해결한 로마는 기원전 4세기 말까지 강대국으로 군림하며,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킨다.
로마의 풍습과 법률, 정신, 라틴어는 유럽 대부분의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중동,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 이토록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제국은 역사상 로마가 유일하다.
솔론의 개혁,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지다
아테네의 발달한 상품경제와 건전한 민주정치에 대해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의 학교다"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 아테네의 모든 정치권력은 귀족의 후예가 장악하고 있었다. 집정관과 원로원 구성원 모두 귀족 중에서만 선출되었다. 솔론은 수석집정관으로 임명된 후 헥테모로이(빚 때문에 땅에 묶인 농민)를 폐지하여 노예로 전락했던 아테네인들이 모두 자유의 몸이 될 수 있게 했다.
솔론의 개혁은 공정의 개념을 제시하고 그리스 민주제도와 자유의 기틀을 다졌을 뿐 아니라, 유럽 민주제도의 중요한 근간이 된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 인류를 단결시키다
고대 그리스는 여러 도시국가로 나뉘어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엘리스와 스파르타처럼 각 도시국가들은 서로 경쟁했지만, 같은 민족임은 의식하고 있었다.
오랜 분열과 살상에 불만을 느낀 그리스인들은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 평화롭고 통일된 그리스를 건립해주길 바랐다. 제우스, 헤라클레스 등 영웅 신화가 출몰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에서 "노예제가 그리스 사회의 발전과 번영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노예제가 없었다면 그리스는 존재할 수 없었고, 그리스의 예술과 과학도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썼다.
올림픽은 이런 도시국가들 사이의 긴장된 대치 국면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살라미스 해전, 아테네 문명이 우뚝 서다 (BC 490년)
기원전 490년, 세계 역사상 최초로 유럽과 아시아의 대규모 국제전쟁이 벌어진다. 고대 그리스는 지리적 개념일 뿐 실제로는 여러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 연합군의 지휘관이자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와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가 바로 영화 '300'의 배경이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은 장렬히 전사하지만, 그들의 희생은 그리스 연합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 아래 그리스의 완승으로 끝난다. 이를 통해 아테네는 에게해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흑해로 통하는 요충지를 통제하며 비잔틴을 포함한 에게해 연안 전략적 요충지를 획득한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 동서양 교류를 촉진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각 자기 편 동맹 도시들을 거느리고 싸운 전쟁이다.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를 쇠망하게 만들었고 북부 이웃국가 마케도니아가 강성해지는 계기가 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로,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여 전 세계 그리스화의 꿈을 꾸었다. 그리스 반란을 평정한 후 페르시아로 진격하여 다리우스 3세를 무너뜨리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 딸을 포로로 잡아 페르시아의 절반과 바꾼다.
이로써 마케도니아는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나일강 삼각주 서쪽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다.
카이사르, 로마 제국의 기초를 닦다
기원전 100년에 태어난 카이사르가 활동하던 시기, 로마 공화국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노예제가 가장 발달한 국가였던 로마는 군사 약탈과 조공 등 피정복 지역에 대한 수탈로 계급 분화가 가속화되고 있었다.
기원전 130년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민주개혁 방안을 제안했는데, 처음에는 합법적 개정 요구였으나 점차 폭동과 내란으로 변화했다. 기원전 70년에는 검투사 출신의 노예반란 지도자 스파르타쿠스가 주도하는 노예봉기가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로 몰아간다.
젊은 시절부터 귀족 공화파로부터 배척당한 카이사르는 민주파에 합류하여 점차 반대파의 우두머리가 된다. 히스파니아(지금의 스페인)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군대를 조직해 현지 독립마을을 정복하며 부를 축적한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멸시를 받자, 군대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폼페이우스, 로마 최고의 부자 크라수스 와 삼두동맹 을 맺는다. 이후 삼두동맹을 깨고 로마를 다시 통일한다. 이때의 로마는 과거의 우유부단한 공화국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중앙집권적 군사독재 국가였다.
카이사르는 귀족 공화 체제를 붕괴시키고 군사, 정치적 대권을 장악하여 군주독재 체제로의 이행을 완수했다. 율리우스력 제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부적인 재능과 관대함, 넓은 도량을 갖춘 인물이었다.
악티움 해전, 로마가 제국이 되다
카이사르가 살해된 후 그의 부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권력다툼이 벌어진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는 제2차 삼두동맹을 결성하지만,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에 휘둘리자 삼두에서 제외되고 이집트에 선전포고를 한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이 발발한다. 안토니우스는 아테네로 진격하여 옥타비아누스를 공격하지만 해전에서 참패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사망했다는 소문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자결하고, 클레오파트라도 뒤따라 자결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하여 이집트를 합병하고, 이집트 왕조는 멸망한다. 이로써 로마 대제국이 건설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신격화되어 아우구스투스라 불리게 되며, "나는 벽돌로 된 로마를 물려받아 대리석으로 된 로마를 물려주노라"는 말을 남긴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로마 확장의 한계 (기원후 9년)
기원후 9년, 아르미니우스가 통합한 게르만족 연맹과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 총독이 지휘한 로마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만족 출신으로 바루스의 보조군에 입대했던 장교였다. 로마 시민권을 얻고 로마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로마군의 전술을 꿰뚫어보고 그들을 기만할 수 있었다.
게르만족은 3개 로마 군단과 보조군들을 박살내며 결정적 승리를 거둔다. 이 전투는 로마 제국의 게르만 지역 확장에 한계를 그은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고대 서양사는 도시국가에서 시작해 대제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철학, 로마의 법률과 제도는 오늘날까지 서양 문명의 뿌리로 남아 있다.